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문단 편집) == 1915년 대학살: 100만 == [[파일:시리아 아르메니아 학살.jpg]] 시리아 사막에 남겨진 아르메니아인들의 유골을 바라보는 한 아르메니아 지도자 오스만은 이후에도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1차 대전]]을 겪으며 나라가 기울어 갔다. 오스만 제국은 결국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 제국의 '성전'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울 것을 요구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해서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대응하여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에르주룸 회담이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 사이에서 열렸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를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 위협으로 판단한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캅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약 300만 정도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당연히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늘어났다. 2차 아르메니아 학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연합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를 빼놓을 수 없다. 복잡한 풀네임보다 당시 서구 언론의 애칭이었던 [[청년 튀르크당]]으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CUP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옅어서 초기까지만 해도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 쿠데타가 수도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던 아다나에서 이 기회를 틈타 현지의 반동주의적 무슬림들이 쿠데타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뒬하미트 2세의 반동 쿠데타 자체는 고작 11일 만에 제압되고 헌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만 5천에서 3만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된 이후였다. 현대까지도 튀르키예에서는 이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이었다든가 단순히 정치적 보복에 불과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면서 이 사건의 인종주의적 성향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이전부터 계속 이어져 오던 일련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의 일환인 [[반]](Van) 사건이 뒤이어 터지고 1915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시대가 바뀌어 오스만은 CUP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피지배민족의 권리나 인도주의 같은 것을 함양한 세력은 아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구 열강의 오스만 침탈을 겪으며 이런 서구의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건 이전이나 현대에 들어와서 보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한 반인륜적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당장 학살을 주도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이었던 탈라트 파샤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 박사 같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무늬만 무슬림'이지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종교에 냉소적인 인간들이었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치하의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들 중에도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이들과 달리 대체로 불가리아 공산당의 통치에 순응하는 편이었으며 그에 따라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들이 튀르키예 본토로 대거 망명할 때도 이들은 끝까지 불가리아에 남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는 이들이 외국의 저널리스트나 평소의 발언과 행동, 훗날 회고록 등에서도 잘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무슬림적 관점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열등하긴 하지만 그래도 보호해 주어야 하고 이슬람 국가에서 살 자리가 있는'''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 정치적 대립과는 별개로 신학적으로 이슬람교가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의 마지막 후발 주자로서 기독교과 유대교에서 계승한 게 하도 많아 종교적 관점 자체로만 보면 무슬림들이 질색하는 건 가장 먼저 [[공산주의]]와 같은 [[무신론]] 세속주의고 그 다음으로 토착 다신교 신앙들이지 기독교, 유대교는 오히려 '유일신을 믿지만 '''틀린 방식이 문제'''라고 하며 유하게 대한다. 이런 문맥이 있기 때문에 이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그리 살벌한 대립각을 새우면서도 막상 자국 내 유대인 커뮤니티들에겐 의석 보장, [[호메이니]]의 "시오니스트와 유대인은 다르다"는 발언 등으로 나름 유화책을 쓰는 거고 심지어 그 [[다에시]]도 막상 기독교인들을 쳐죽이면서도 가식적이지만 '기독교 부서'라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던 형식적인 개별 부서는 만들었다. [[야지디교]] 같은 아예 기원 자체가 아브라함교가 아닌 다른 종교인들은 이런 서류상 분류도 안하고 그냥 제노사이드적 학살을 한 걸 보면 이슬람에서는 나름 유의미한 차이다.],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탈라트 파샤를 비롯한 CUP 지도부는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로 민족적인 문제로 보았고 튀르크인들이 지배하고 영유해야 할 땅인 아나톨리아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박멸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단순한 징벌, 차별의 대상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적 의미에서 절멸해야 할 열등 인종'''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전과 달리 1915년에 벌어진 대학살에서는 추방과 학살을 피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도''' 박해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추방, 학살하였다. '''흔히 튀르키예 측 친정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지정학적 갈등에 의해 터진 게 아니라 조직적이고 인종적 논리에 따라 자행된 근대적 제노사이드라는 걸 입증하는 사실이 이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선 전근대적인 술탄 정부보다 더 잔혹한, 근대적 민족주의로 무장했으며 이 시기 서양 제국주의 열강 혹은 후대의 나치 독일 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오스만 정부는 현지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인들에게 협조하려 들 것이라고 의심했는데 누가 그런 상황을 자초했는지만 차치하면 판단 자체는 상식적이었다. [[장군]]인 [[엔베르 파샤]]의 [[처남]]이자 반 일대 총독으로 부임해온 정치인이자 제브뎃 베이 벨베즈(Cevdet bey Belbez/ 1878 ~ 1955)는 무슬림이지만 종교 광신을 무척 싫어하였으며 아르메니아가 독이 될 것이라고 여겨오던 매우 강경한 반아르메니아주의자였다. 그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잔뜩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의 20년째 겪고 있었던 학살과 약탈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어느 정도 무장을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또 반대로 오스만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까지 나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은 미궁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으며, 제브뎃 베이 본인도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거기에 [[발칸 전쟁]] 당시 벌어진 학살도 문제였다. 당시 [[불가리아]]는 [[포마크인]]들과 튀르크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는데 학살을 피하여 몸만 겨우 빠져나온 수십여만 난민들을 바로 오스만에서 받아들였다. 이 학살 여파로 정교회나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이를 갈던 이들 [[난민]]들은 민병대를 이뤄 기독교인들에게 보복하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이런 분위기를 읽은 오스만 측이 이들을 정규군으로 받아들여서 아르메니아 기독교 세력 척결에 사용했으니 그 결과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불가리아 놈이나 아르메니아 놈들이나 똑같다고 여기던 이들은 증오심으로 닥치는 대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로선 운 나쁘게도 이 학살에서 살아 돌아온 지 몇 년도 안 되어 생생하게 기억하던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비슷한 경우로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의 침략을 받은 [[체르케스인]]들이 있다. 이들도 무슬림이 다수였지만 이슬람에서 꽤 관용적이던 [[수피즘]]이 상당수였다. 그래서 이들은 주변 기독교인들을 크게 학살하는 것도 없었고 사이가 나쁜 것도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이들에게 쳐들어오면서 이들이 정교회 신도들을 학살했다는 억지를 침략 명분이라고 들이대면서 엄청나게 학살했다. 러시아와 마지막까지 싸우던 체르케스인 지도자 이맘 샤밀(1797~1871)만 해도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게 [[편지]]를 보내 대체 '우리가 대체 언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괴롭혔다는 건지 그 증거를 보이라'고 따졌을 정도. 알렉산드르 2세도 증거가 없으니 억지로 우기기만 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러시아 제국에게 전 인구 1/4이 학살당하거나 억지로 추방당하자 이들은 "종교적 관용으로 이웃 기독교랑 사이가 좋았는데 그 댓가가 이거였냐?"며 [[증오]]로 이를 갈았다. 오스만으로 이들이 와서 살게 되면서 이들 체르케스인들도 이를 갈고 있었는데 불가리아가 독립하기 전에 독립 저항을 벌이자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군인으로 받아들여 파병 보내거나 특별 허가 민병대로 참전시켰다. 결국 러시아 제국이 벌인 학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체르케스인들은 증오로 불가리아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약탈해 분풀이로 삼은 셈. 불가리아도 이를 잊지 않고 똑같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불가리아인 학살과 상관도 없는 포마크인들이나 다른 무슬림들을 똑같이 분풀이로 학살했으며, 이로 인해 이들도 똑같이 오스만으로 들어와 살면서 이를 갈다가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복 학살해 버리는 [[부메랑]]의 연속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후술하는 대로 아르메니아인들도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보복 학살해 버리는 또 다른 부메랑이 되어 버렸는데 얄궂게도 이들을 섞여 살게 하는 데 기여한 게 러시아였다.[* 이 문제의 [[만악의 근원]]이었던 러시아는 기독교 세계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만행으로 인해 애꿏은 현지 기독교인들만 학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그 명분 자체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만에 불과했지만.] 이러던 와중에 반 시에 도착한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대표들에게 젊은이 4천 명을 징집하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제브뎃 베이는 이미 반 일대에서 숱하게 학살을 벌인 전과가 있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제브뎃 베이가 먼저 도시의 가용 병력을 제거한 뒤 쳐들어오려는 심산이라 판단하고 징집령을 거부했다. 반 공방전의 시작으로 알려진 1915년 4월 20일 직전인 4월 19일 하루에만 2500여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된 상황이었으니 아르메니아인들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에 맞설 힘이 없었다. 결국 4월 20일 명령에 저항하는 도시를 봉쇄하고 있던 튀르크군이 도시에 들어가려던 아르메니아 여성을 붙잡아 희롱하자 이를 막기 위해 도시에서 아르메니아 남성 둘이 뛰쳐나왔고 튀르크 군인들이 이들을 사살하자 분노한 [[아르메니아인]]들이 튀르크 순찰대를 공격했다. 이에 제브뎃 베이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구역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반 공방전이 시작됐다. 도시 내부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과 무슬림들의 전투가 벌어졌고, 도시 외곽에서는 진입하려는 오스만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교전을 벌였다. 한때 러시아군이 동부 아나톨리아로 깊숙히 진격해오고 튀르크군이 후퇴하며 포위가 풀린 적이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패배하고 밀려나기 시작하자 반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도 대부분 피난을 갔다. 이 피난 과정에서 쿠르드족의 공격으로 막대한 희생이 발생했다. 반 시에 거주했거나 반으로 피난했던 인원 중에서만 보통 5만에서 6만 정도가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오스만 제국은 곧이어 벌어진 비틀리스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물리치고 시간을 벌자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모두 살던 곳을 떠나 시리아 사막 등으로 강제 이주당했는데 오스만은 이주 중에도, 이주 후에도 제대로 된 도움을 제공한 적이 없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을 의도적으로 아사시켰다. 오스만군은 이주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고 야외에 노출된 아르메니아인들이 쿠르드족을 비롯한 적대 세력들에게 공격받는 것도 사실상 수수방관하거나 오히려 이를 조장했다. 튀르키예는 지금까지도 이 학살을 은폐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튀르키예의 입장을 무분별하게 대변하는 자들은 저 학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노선 갈등으로 자기들끼리도 죽이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싫어한 쿠르드족들도 학살에 나섰고 많은 수가 직접적으로 살해되지는 않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서 참 복잡한 사건이라고 말하며 애써 오스만의 책임을 희석하려고 시도한다. 그 논리면 [[홀로코스트]]는 [[폴란드인]]들도 [[유대인]]들 학살에 동참했다고 많은 수가 직접 살해된 게 아니라 [[아우슈비츠]]에서 기아와 강제노동으로 죽었으니 참 복잡한 사건이 되는가? 결국 홀로코스트의 최종 책임은 [[독일]]에게 있다고 보는 것처럼 아무런 지원도 보호도 하지 않으면서 가혹한 환경으로 내몬 것은 직접 죽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이 학살의 의도를 갖고 자행한 일인 것이 당연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저런 오지로 보낸 당사자들은 명백한 살해의 의도를 갖고 있었고 단지 그들이 선택한 수단이 자연이나 타 민족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직접적으로 학살한 숫자도 매우 많다.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반미]], [[반서방]] 분위기에 의한 무분별한 [[이슬람교]] 띄워주기로 인해 오스만의 대학살을 옹호하거나 물타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리 국제 사회에서 튀르키예가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게 튀르키예의 [[극우]] [[민족주의]]자나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까지 인정해줄 필요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같은 논리를 적용하자면 [[일제강점기]]도 같은 조선인 친일파에 의한 탄압과 고문이 횡행했고 독립운동가들끼리 이념 차이로 싸우는 일이 있었으며 조선을 떠나 만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군]]의 총칼이 아닌 기아와 질병과 마적떼에 죽는 조선인이 허다했다. 애초에 논점도 잘못 잡혀 있는 게 상술되어 있듯 메츠 예게른의 주동자들은 무슨 신실한 무슬림들이 아니라 이슬람교 역시 세월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미신 운운하며 종교 자체를 냉소적으로 봤던 오히려 나치 독일과 유사한 '''근대적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문명화가 덜 돼서' 메츠 예게른이 터진 게 아니라 다양한 민족, 종교 집단이 적당히 느슨히 공존하고, 국가는 여기서 현실적인 이익 뽑아먹는 거에 초점을 두었지 사회 공동체 자체의 정치적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주물한다는 생각을 안 했던 전근대, 근세적 제국이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과 총력전이란 강제적, 폭력적 근대화를 겪으며 '문명화 과정'에서 터진 사건이다. 이 항목에서 보듯이 이 학살로 죽어간 사람들에 바로 무슬림들 또한 엄청 많았다는 걸 생각해보자. 더불어 이 학살을 두고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계에선 '''억울한 기독교도들을 무슬림이 학살한 사건'''이라고 부르며 반중동, [[이슬람혐오]]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집단으로 불태워 죽이거나, 발에 [[편자]]를 박고 춤을 추라며 [[채찍]]으로 때리거나, 볼 수 없다며 얼굴을 돌린 신부의 [[눈(신체)|눈]]을 뽑아 버리거나, [[참수]]한 머리를 들고 의사에게 붙여 보라고 하거나, [[치아]]를 모조리 뽑은 뒤 이마에 박아 버리거나, [[참수]]한 머리로 때리거나, 남자들을 모아둔 뒤 [[총살]]한 다음 총알이 아깝다며 [[총검]]으로 [[확인사살]]하거나, 여인들을 [[성노예]]로 인신매매하고, 아이들을 배에 태우고 나가 물에 던져 죽이는 등 참으로 잔혹하기 그지없는 엽기적인 방법들까지 동원해 가면서 숱한 아르메니아인들이나 아시리아인, 아랍 무슬림들을 대학살했고 통계상 감소한 인구가 100만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메니아/역사]] 문서의 1911년 인구 통계와 1920년대 인구 통계 비교 및 참조]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렇게라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만 덩달아 학살당한 쿠르드족이나 아시리아인, 그리스인, [[아랍계 기독교인]]들은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살았기 때문에 서로 동족으로 여기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학살하면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었던 씁쓸한 역사가 있다. 더불어 당연하지만 [[튀르크]]인이라고 해서 닥치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죽인 것도 아니며 목숨 걸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켜준 튀르크인들도 있었다. 2001년 당시 98살이었던 바살프 아티람치안이라는 아르메니아인은 어릴 적 자신이나 가족들과 이웃, 수백여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오스만군이 죽이려 추격할 당시 이제 우린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다 포기했는데 지나가던 튀르크인 양치기가 대충 보더니 나를 따라오면 목숨이라도 일단 구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일단 따라가니 작은 변두리 마을로 간 양치기가 대충 설명하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지하라든지 헛간에 아르메니아인들을 숨겨주고 물건은 대충 창고에 넣고 [[일상]]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추격하던 오스만 군인들이 와서 아르메니아인들 행방을 묻자 누군지 모를 이들이 무더기로 저쪽으로 가는 걸 잠깐 보았을 뿐이라고 거짓말하고 며칠이나 숨겨줬다고 한다. 이 마을로 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도중에 병으로 죽은 한두 명 빼고 모두 [[아르메니아]]로 무사히 달아났다고 한다. 90년대 들어서야 이 증언을 토대로 아르메니아 측에서 이 마을로 와 보았지만 마을은 흔적도 없어진 다음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부 오스만 정계나 언론도 '이건 학살이다! 범죄를 왜 저지르는가?'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매국노로 몰려 같이 학살당하거나 [[암살]], 테러에 시달려 침묵하든가 해외로 달아나야 했다. 정치인이자 언론인 알리 케말 베이(Ali Kemal bey, 1867~1922)가 대표적으로, 케말 베이는 정계, 언론으로 이 학살을 반발하며 비난하다가 누레딘 이브라힘이 이끄는 오스만 군에게 잡혀 이즈미르에서 공개처형되었으며 죽은 후에도 매달린 시체가 돌을 맞는 등 린치를 당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ikemalbey.jpg]] 알리 케말 베이의 사진 알리 케말 베이는 튀르크인이 아니라면서 당시 오스만 측은 엉터리 아르메니아 이름을 붙여서 매국노는 이름도 아르메니아 놈처럼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을 지경이었다. [[고인모독|그야말로 2번 죽인 셈.]] [[파일:external/www.bbc.co.uk/alik_wife.jpg]] 케말 베이와 아내인 마거릿의 사진. 케말 베이는 영국 [[런던]]에서 영국 [[여성]] 마거릿 윌프레드 존슨과 결혼했는데 아들인 오스만을 비롯하여 [[아내]] 마거릿은 영국에서 살면서 베이라는 성을 버리고 외가인 존슨이란 성으로 살아갔다. 오스만도 아버지처럼 영국 여성과 결혼하여 스탠리 패트릭 존슨을 낳았으며 스탠리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스탠리의 아들이 바로 [[튀르키예계 영국인]] 정치인인 [[보리스 존슨]] 총리. 반대로 케말 베이의 딸인 셀마는 나중에 튀르키예로 돌아와 튀르키예 국적을 얻어 조용히 살다가 갔다. 그런데 그녀도 배터스비라는 영국 남성이랑 결혼해 [[혼혈]] 아들을 낳았다. 2016년 4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도 이걸 다뤘는데 이 당시 튀르크인 농부가 도와줘 목숨을 구해 무사히 아르메니아로 간 아르메니아인 증손자들이 목숨을 구해준 튀르크인 무슬림 증손자랑 지금도 종종 만나며 친하게 지내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스만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반감도 컸지만 아르메니아인을 도우면 매국노로 몰려 같이 처형당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학살을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갈 순 없지만 말이다. 홀로코스트로 악명 높은 나치 독일도 일부 [[독일 국방군]] 병사들이나 장교들이 유대인이나 집시들을 살려주거나 국외로 도망가게 해주고 입다물어 살아남게 해 준 경우라든지, 1970년대 후반 [[킬링필드]]로 악명 높았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도 일부 크메르 루주군 병사와 간부들이 킬링필드 당시 일부 캄보디아 시민들을 죽이지 않고 집단 농장과 국립 공장의 노동 인력으로 살려둔 경우가 있었고 1990년대 후반 이슬람 극단주의에 의한 폭정과 학살을 펼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도 멋 모르고 탈레반 정권 치하에서 내린 이슬람 율법령을 위반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징역형과 경고 등으로 일정 부분이나마 온건하게 처벌하거나 한 번 정도만 봐 준 것처럼 어디에든 소수나마 이런 건 다 있다. 하지만 이런 소수와 달리 대다수의 학살 피해자가 더 압도적일 뿐이다. 그나마 이런 소수의 생존자들이 목격자로서 제대로 당시 상황이나 여러가지를 증언하게 하여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했으니 이런 소수라도 살아남게 한 것이 조금이라도 의의가 있긴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